평양교구 의주(義州)교회 (1911~1950)

민화위  | 2010-01-29 09:38:46 | 조회 : 3951 인쇄하기

평양교구 의주(義州)교회 (1911~1950)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천주교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476~487쪽


의주는 한반도 서쪽 끝단에 위치하여  압록강 하류 좌안에 있으며, 압록강을 국경으로 서북은 만주와 대치한 국경의 요새지이며 신의주(新義州)가 생기기 전에는 만주에 대한 우리나라 국경 도시였다.


 이조(李朝)중엽부터 의주는 한국천주교회사와 깊은 인연을 가진 곳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의주 변문을 통하여 들어왔고 제2대 앵베르범(花世亨, Imbert)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었으며,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가 남은 곳일 뿐 아니라 초대 신자들이 북경(北京)을 내왕하던 통로로서 한국 천주교의 성지(聖地)라 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며 역사적 고적이 많은 곳이다.

채(蔡)오스칼 신부는 1899년 가을 양덕현(힐라리오) 복사를 대동하고 전교의 첫 번째 포교지를 의주지방으로 정하고 의주 일대 포교에 전념하기 위해서 평북 지방에서 첫 번째로 의주 공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9월 서울교구에서는 평북 지방의 장래를 고려하여 서병익(徐, 바오로)신부를 의주 본당 신설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서 신부는 부임 즉시 읍내 남문동 사가(私家)에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성당 건축을 위한 계획도 서둘렀다.


 1915년 3월 3일 서울 교구장 민(閔, Gustav Mutel)주교가 의주 본당을 순방하였을 때 8년 전에 비해 성당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많아진 신자들을 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강복하였다. 다음 날 미사에서 22명에게 성세성사, 66명에게 견진성사를 준 후 의주를 떠났다.


 1917년 공소회장 최응하(베드로)는 80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여 모은 돈을 성당 건축 부지 구입 및 공사비로 희사하였는데, 본당 서 신부는 그 자금으로 먼저 의주읍 동문(東門)을 벗어난 동외동(東外洞) 속칭 재고개라는 언덕의 2만여 평을 구입하고 연와제 성당 신축을 추진하였다. 서 신부가 직접 지휘 감독하여 근 1년 반 만에 준공을 마쳐 1919년 10월 7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신축된 성당은 ‘성모승천’으로 주보를 정하였고 새 성당에서 60명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신축된 성당은 총 공사비 1만여원이 소요되었으며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건축양식으로서 당시 평안도에서 가장 큰 성당이 되었다.


 서 신부는 서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 요청하여 1921년 11월 23일 황베네딕다 수녀와 이 바울라 수녀 2인이 의주 본당으로 파견되어 왔다. 수녀들은 한글 공부와 경문과 노래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해성학교(海星學校)의 기원이 되었다.

 

 평안도가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포교 전담지로 결정되자 메리놀회 선교사 3명(方·吉·睦 신부 등)이 의주교회를 준비작업의 본거지로 삼았다.


 평안도 사목권이 메리놀회로 이양되자 1924년 서 신부는 서울교구로 복귀하였으며 성 바오로회 수녀들도 본원으로 철수하였다.

 

 2대 본당 주임으로 취임한 길(吉 ,   Patrick Cleary)신부는 첫 사업으로 서 신부가 운영하던 해성 유치원을 임시 휴원 시킨 후 무인가 해성학원(海星學院)을 신설하고 빈민자녀 백 수십 명을 모집하여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의주 본당에 주재하던 강(姜,Joseph Cassidy)신부도 자선사업에 남달리 큰 뜻을 가져 사재를 털어 읍내 사가(私家)를 구입하여 1925년 양로원을 신설함으로써 평양 교구 내 최초의 자선사업 기관을 건립하였다.

 

 1928년 4월 길 신부는 평양으로 전근되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백(白, Leo Peloquin)신부는 전임자가 마련한 교육기관과 양로원 운영을 3년간 착실히 운영하였고,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부(夫, Booth)신부는 길 신부가 세웠던 해성 학원이 운영상 어려움으로 폐교하게 되자 희망하는 재학생에 한해 취직 알선과 면학의 기회를 주고 입학을 시켜 수업료를 부담하여 주었다. 그리고 길 신부 당시 폐원되었던 해성 유치원을 다시 운영하였다.

 

 1934년 파(巴, Jacobus Pardy)신부가 비현에서 부임하였다.파 신부는 전교사 박봉서(요한) 이외 남녀 전교사 3명으로 하여금 포교 일선을 전담토록 하여 소속 공소 5개를 합한 신자 500명을 확보하고 사목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파 신부는 주일학교 운영에 주력하여 어린이들의 영신 지도를 철저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신앙이 약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감화되어 교회에 더 열심히 나오게 되는 예가 많았다.

 

 또한, 파 신부는 유치원과 양로원의 확장에도 진력하여 600여 원을 들여 한옥 50평을 증축하여 양로원을 짓고 남녀 노인 31명을 부양하였으며 고아 17명은 양육비를 본당 신부 부담으로 교우가정에 맡겨 기르게 하였다. 그리고 해성야학도 계속 운영하여 문맹 퇴치 사업에 힘썼다.

 

 의주 본당 사업에서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메리놀 수녀회의 활동을 빼 놓을 수 없다. 메리놀 수녀회는 1924년 10월부터 한국에 진출하여 우선 의주를 임시본부로 정하고 장차 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1926년 영유(永柔)에 한국 지부를 마련하고, 신의주와 평양에 분원을 설치하여 윌님 분원장 이외 2명의 수녀들이 소규모이지만 고아 양육시설과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자선사업에 힘썼다. 5대 본당 주임 부 신부 때 고아 양육은 본당 신부에게 넘겨주고 시약소만을 계속하다 1936년 신의주에 성모병원이 신축되어 본격적인 의료사업에 착수하자 수녀들이 운영하던 시약소는 폐지되었다. 그 후 의주 분원의 수녀들은 전교활동과 성가대 및 신심단체 지도에만 전념하였다.

 

 의주 고장의 신자들은 고귀한 신앙심을 널리 선양하며, 천주교를 이 고장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해마다 9월 26일 복자 축일에는 순교자들에 대한 성극(聖劇)공연과 제등행렬 등 다채롭고도 화려한 행사를 끊이지 않고 거행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감금되어 교회에는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고 1942년 2월 평양 교구가 방인 교구로 새 출발 하면서 의주교회에는 강영걸(康, 바오로)신부가 부임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총동원령으로 일본 관헌들이 착취에 혈안이 될 때 강 신부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을 무마시켜 의주교회는 큰 박해는 받지 않았다. 유기 헌납 문제의 경우에도 강 신부의 노력으로 화를 면했다.

 

 1943년 4월 동 교구 내 신부이동으로 강 신부는 운향시 본당으로 전근되고, 김교명(金, 베네딕또)신부가 부임하였다. 날로 어려운 시국에 직면하여 사목활동 및 부속사업에 큰 고충을 겪었으나 신자들의 자립정신과 김 신부의 차분한 교회 운영으로 큰 피해 없이 계속되어 나갔다.

 

 전쟁 종말이 가까워온 1945년 4월 5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의주 분원이 신설되어 수녀들이 양로원 운영과 신심단체 지도를 담당하여 본당 신부를 크게 도왔다. 당시, 본당 신자수는 1500여 명이었고,교회 부속 사업체였던 해성학교, 유치원 등은 폐쇄되고 양로원만이 계속 운영되었으나 수용인원은 20명에 불과하였다. 양로원 보조 농경지에서 나오는 모든 소출은 공출당하고 겨우 강냉이(옥수수)죽으로 연명해야 하는 실정이었음으로 양로원 운영에 많은 고충이 따랐다.

 

 8·15 해방 이후 잠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교회의 자립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에 생기가 넘쳤으나 공산당의 정치적 기반이 잡혀지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한편, 김 신부는 36년간 일본의 지배 하에 버려져 황폐화된 변문(邊門)과 수구문(水口門)일대를 하루 속히 교회에서 매수하고 수리, 보수하기 위하여 북한 당국에 여러 차례 교섭을 추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본당 신부는 새로운 입교자를 위한 포교활동보다 신자들의 신심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주일강론과 기타 신심행사 때에 순교복자들의 행적을 소개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치명자들의 후손답게 신앙을 용감히 증거 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해마다 복자 성월이 되면 의주 본당에서는 변문을 찾아가 성월 기도와 복자찬가를 부르는 등 순교자들을 위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47년 여름부터 주교좌성전 건축사업의 봉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의주본당 신자들은 타지방보다 한걸음 앞서 성전 건축 기금 모금에 성의를 다하였고, 근로봉사에도 240km에 이르는 원거리를 멀다 아니하고 식량을 갖고 평양으로 파견되었으니 그 인원으로나 열성에 있어 타본당에 모범이 되었다.

 

 1949년부터 본당 주임 김교명 신부는 공소 순방길에 얻은 병환과 공산주의자들의 성무 집행 방해로 사목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오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마디의 반항도 없이 순교자적 정신으로 체포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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