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증거자들(1)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뉴스레터입니다
장긍선 신부  | 2013-03-05 10:16:41 | 조회 : 2122 인쇄하기

한국은 세계에서 몇 손안에 드는 많은 순교자와 성인들을 배출한 나라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순교자라고 하면 100여년 전 조선시대나 먼 옛날에 신앙을 증거 하다 돌아가신 분들만 생각한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 오지는 물론 문명화된 나라들에서도 새로운 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 한반도에서는 조선시대 이래로 6.25라는 민족상잔의 큰 비극 속에 새로운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고,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해방과 함께 들어온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순교의 형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북한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올 한해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던 이 새로운 순교자들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그로인해 이 분들의 신앙의 모범과 희생을 잊지 말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며 아직도 삶속에서 순교의 삶을 걷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1. 페트릭 번 주교

북한의 공산화와 6.25 전쟁 중에 3분의 주교님과 한분의 교구장 몬시뇰, 그리고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먼저 교황사절 즉 오늘날 교황대사의 전신인 바티칸 대표 외교관으로 일하시다 돌아가신 페드릭 방 주교님을 소개하겠다.


페드릭 주교님은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출생하여 1915년 6월 2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2년 11월 포교성성에서 메리놀회에 한국의 평안도 지역을 위임하자 페트릭 번 신부는 11월 27일 한국의 첫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 5월 10일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의주 본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메리놀회 한국 지부를 출범시켰다. 이후 본부를 비현, 신의주로 옮겼고, 계속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메리놀회 신부와 수녀들을 지원받아 교세신장 및 성당 건축에 힘썼다. 1927년 3월 17일 평양 지목구가 서울 대목구로부터 분리 설정되자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래 주교좌를 설치할 도시로 평양을 생각하고 지목구 본부를 평양 외곽 서포로 옮겼다. 1929년 8월 메리놀 총회에서 제 1참사 위원으로 선출되어 지목구장을 사임 하였으며, 3년 뒤 메리놀 신학교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메리놀회가 1937년에 일본에 처음으로 진출하게 되자 다시 새 포교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1937년 7월 17일 교토 지목구장에 취임 하였다.


1947년 8월 12일 교황 비오 12세는 번 몬시뇰을 한국 초대 주한 교황 사절로 임명 하여 다시금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제 교황 사절이 된 번 몬시뇰은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하고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승인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였다.


1948년 11월에는 전국적인 교회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하여 한국 천주교 중앙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949년 4월 17일에는 주교로 임명되어 6월 14일 명동 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자국민들을 모두 일본으로 대피시키며 주교님께도 함께 피신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번 주교는 한국의 성직자와 신자들과 함께 남겠다고 피신을 거절하고 서울 궁정동 교황 사절관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들에 의해 교황 사절관이 모두 약탈당하고 날로 상황이 어렵게 되자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 지냈다. 그러나 1950년 7월 11일 명동에서 체포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평양으로 이송되어 7월 19일에 평양감옥에 투옥되고, 10월 8일에는 만포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어 같은 날 10월 8일에는 고산진으로, 그리고 이어 초산진 등으로 끌려갔다가 11월 7일 중강진 부근 하창리 수용소로 이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 여정 중에 얻은 고초와 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함께 끌려갔던 춘천 지목구장 퀸란(T.Quinlan  SSC) 몬시뇰(후일 주교)에게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하느님께서 내개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비서인 부드 신부에게는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은 당신들 모두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수난 받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1950년 11월 25일 62세의 나이로 순교하여 하창리 근처에 묻혔다.


번 주교는 매우 겸손하여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면서도 명예나 위엄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으며, 매우 깊은 영성을 지닌 분이셨다.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으라는 오랜 수도회 규칙처럼 자신을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최선을 다해 맞이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완벽주의자로 매일 밤 모든 이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이면 홀로 성체 앞에서 한 시간 이상의 기도를 바쳤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놓쳐도 밤중에라도 성무일도는 꼭 바쳤고, 매일 묵주기도 15단 전체를 바쳤다. 그리고 자신이 두 번에 걸쳐 사목 하게 된 한국을 극진히 사랑하여 자신의 주교문장에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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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억의 돋보기 (1984. 바오로딸. 레이먼드 A. 레인)- 번 주교님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한    부드 신부님의 회고록 '사슬에 묶인 사절'을 바탕으로 저술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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