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북한 고모를 만났을 때 인쇄하기
이름 김지영
2010-12-02 08:52:11 | 조회 : 4399

정말이지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나는 물론, 온 집안이 충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 행방불명되었던 큰 고모. 그랬던 큰 고모가 북한에서 살고 있다니. 더욱이 남쪽 혈육들을 만나겠다고 신청해 제18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지난 10월 말) 서로 만나게 됐다고 관계당국이 전해왔다.
거기에 더해, 나로서는 객석의 관객이 무대 위로 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신문기자 시절 한동안 남북관계를 전담했다. 1985년 제1차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을 비롯해 여러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고 이산가족의 슬픔, 분단의 비극을 기사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기자생활 동안 이산가족의 슬픔은 뼈아픈 동족의 문제였지만 나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평생 나에게 취재대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고?  한동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아름다운 산천에서…”
큰 고모(김은숙·78세)는 원래 나에게 종고모(5촌)이다. 넷째 할아버지의 세 따님 중 맏이이다. 종조부께서 돌아가시자 집안에서는 아들이 없는 종조부의 제사를 모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 부친이 선택되었다. 호적상 ‘사후입양’은 불가능하므로 사문서인 족보상 숙부의 ‘자(子)’로 편입된 것이다. 자연히 북한 고모를 만나러 가는 5명의 친척을 구성할 때도 북한 큰 고모의 생존 동생인 둘째 고모(75세), 그 딸(50세), 큰 고모의 사촌오빠들인 숙부(84세)와 당숙(88세), 그리고 친조카뻘인 내가 선발되었다.
일단 속초에 집결하라는 전갈이었다. 거기에서 금강산으로 월북, 상봉한다는 계획이다. 숙부는 수원에서, 둘째고모와 딸은 부산에서, 나와 당숙은 서울에서 각각 출발했다. 나는 속초로 가는 몇 시간 동안 난생처음으로 당숙과 단둘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당숙은 육사 출신의 예비역 육군 소장. 바로 우리가 버스로 달리는 경춘 고속도로 부근 곳곳에서 전쟁기간 중 포병장교로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그중 춘천 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로 기록돼 있다.
“바로 저기에서 홍천 말고개 전투….” “저 위쪽은….” 퇴역 노장군은 차창 밖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60년 전 목숨을 걸었던 전쟁터를 떠올렸다. 하지만 참혹했던 그 전쟁터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가을 하늘은 공활하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밝은 햇살 아래로 펼쳐지는 만추의 산하는 찬란하기만 했다. 미수(米壽)를 넘어가는 연세 때문일까. 당숙은 만나면 주로 무용담을 전하시던 과거와는 달랐다. 대신 창밖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이 아름다운 산천에서….”

 

남측의 장군과 북측의 여군
집결지인 설악산 한화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이 에워싸고 속사포처럼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구나….” 그리고 평생 처음 취재당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날 저녁 숙부께서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당숙과 고모께 나누어드렸다. 우황청심환이었다. “내일 상봉장에 들어가기 전 이걸 한 알씩 복용하자.”는 말씀이었다. 어른들은 이날 밤, 한 많은 60년 세월을 이야기하느라 늦도록 주무시지 못했다.  
이튿날 남쪽 출입관리소에 도착해 신상명세가 적힌 인식표를 받았다. 귀환할 때까지 목에 걸고 다니라는 당부였다. 그런데 당숙께서는 인식표를 목에 걸지 않았다. 되돌아올 때까지 2박 3일 동안 옆구리에 차고 다니셨다. “군대에서 인식표를 목에 거는 건 한 가지 경우뿐, 포로가 됐을 때이다. 대한민국 장군이 북한에 가면서 인식표를 목에 걸 수는 없다.”는 말씀이었다.
첫 단체상봉. 북측 혈육이 입장한다는 장내 방송이 나오자 작은 고모가 일어나 입구 쪽으로 나섰다. 언니를 잃었을 때 나이가 앳된 15세, 언니 나이는 18세. 각각 75세, 78세 된 노인들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달려가 껴안았다. 큰 고모의 얼굴을 모르는 나마저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조모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늙은 자매는 오랫동안 말없이, 말없이 부여잡고 흐느낄 뿐이었다. 이어 큰 고모는 사촌오빠들과도 껴안고 60년 만의 재회, 그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가족과 고향 소식을 묻고는 울고, 또 묻고는 부여안고 하였다. 큰 고모는 젊은 시절 간호병과로 군에서도 복무했다고 한다. 남측의 장군과 북측의 여군, 한때 ‘주적’이었던 두 사람은 세상에 더없이 소중한 사촌남매였다.
피차 적인 동시에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혈육,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때리는 주먹인 동시에 맞는 뺨…. 분단의 비극적 모순이 눈앞에서 실체로 나타났다. 나로서는 취재기자 시절, 많이 목도하기도 했고 눈시울도 적신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느낌은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육신의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와 온몸을 관통하였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상봉 당첨 
첫 상봉에 이어 만찬상봉과 개별상봉, 점심상봉과 작별 단체상봉이 외금강호텔과 금강산호텔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왔다. 상봉 이틀 동안 특유의 절제력으로 한두 번 낮게 흐느끼기만 하던 둘째 고모. 그런 둘째 고모가 처음으로 떠나는 버스 창틀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기자들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취재를 하고 있었다. 
남측의 이산상봉 신청자 수가 12만 명, 그중 많은 이가 이미 세상을 뜨고 8만 3천 명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상봉 당첨을 기다리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많은 상봉가족들은 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런 상봉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18차 이산가족 상봉 역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2년 만에 열려 겨우 100가족이 만났을 뿐이다. 귀환 버스 속 이산가족들이 터뜨린 화를 나는 이런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서신교환과 상호방문은 둘째 치고, 상설면회소 설치와 상봉 정례화, 수시상봉은 속히 실행해 이산가족의 한을 풀고 통일을 앞당기라. 그러기 위해 남북 정치인들이 모두 잘하라.”

 

* 이글은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5 내가 북한 고모를 만났을 때  김지영 10-12-02 4399
24 어느 새터민 여성의 아름다운 시  예수님의 사랑둥이 10-04-30 5485
23 수도자들과 새터민들이 함께했던 기도모임  로마나 수녀 10-04-01 4933
22 새터민의 남한 정착기  민화위 10-03-19 3227
21 강진명(요셉) 형제를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하며...  민화위 10-03-14 2849
20 새터민 강진명(요셉) 형제님의 장례일정을 알려드립니다.  민화위 10-03-11 2491
19 새터민 강진명(요셉) 형제님의 장례일정을 알려드립니다.  강영숙 10-03-11 2031
18 강진명 요셉 형제님이 어제 밤에 선종하셨습니다.  민화위 10-03-11 2071
17 강진명씨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민화위 10-03-10 2430
16 새터민 화가 강진명씨가 많이 위독하십니다. 기도 부탁드려..  민화위 10-03-09 2047
15 새터민 방요셉 장례미사 강론  민화위 10-03-03 2345
14 2009년 성탄절에 예수님께 드린 새터민들의 편지글입니다...  로마나 수녀 10-03-02 3532
13 새터민 방요셉을 하늘나라로 보내며 동료가 쓴 편지...  로마나 수녀 10-02-25 2885
12 새터민 방요셉을 하늘나라로 보내며 동료가 쓴 편지...  최희숙 10-03-01 2145
11 새터민 전기숙 마리아 자매님이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민화위 10-02-19 2056
10 가정체험 소감을 남겨준 하나원 교육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로마나 수녀 10-02-08 2486
9 새터민 방요셉 형제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민화위 10-02-08 2845
8 2010년 2월 9일 오후 5시 12분에 주님곁으로 갔습니다.  로마나 수녀 10-02-09 2838
7 탈북화가 강진명님의 미술전에 다녀왔습니다.  로마나 수녀 10-02-02 2469
6 새터민 화가 강진명 초대전  민화위 10-01-27 3038
12